너의 목소리가 들려
너의 목소리가 들려
  • 성수진 기자
  • 승인 2015.12.07 12: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Today’s topicⅢ - ‘안락사’ 찬/반토론
  회복할 수 없는 죽음에 임박한 중환자를 고통에서 해방시켜서 안락하게 그 환자의 생명을 단축시켜 사망케 하는 것으로 <좋은 죽음>을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오래전부터 안락사를 주제로 하여 찬/반의 의견들이 끊임없이 제시되었으며, 이는 끝이 날수 없는 영원한 우리의 어려운 과제라고 볼 수 있다.
 이번 기사를 통해 두 기자가 나뉘어 찬성과 반대의 입장에 서서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고자 한다. 구독하는 우리 대학 학우들 또한 기사를 보며, 자신은 과연 어느 곳에 서서 이야기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도록 하자.

<편집자 주>

 

-반대-

반대의견에 앞서 안락사의 개념에 대해 알아보자. 안락사란 불치의 병에 결려 죽음의 단계에 들어선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그 환자를 죽게 하는 것으로 최근 시아보 사건 등을 계기로 이것이 사회 문제화 되었는데 무의미한 연명의 거부’, ‘인간답게 살려는 욕망등의 요구와 인간 생명의 존엄성으로 두 찬, 반 의견이 대립 되고 있는데 이에 관해 필자는 반대의 입장에 서서 글을 쓰려 한다.

사전적 의미에서와 같이 생존가망이 없는 투병생활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환자에게 당사자와 보호자의 동의를 얻어 존엄하게 생을 마감할 권리로서 행해지는 안락사라면 허용하는데 동의를 할 것이지만 문제는 안락사 대상의 범주 안에 드는 모든 경우가 이와같지 않다는 것으로 비록 육체를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인간의 상태에 놓인 환자일지라도 표현할 수 는 없지만 분명히 살고자 하는 욕구를 갖고 있다면 이야기는 다르게 흘러간다.

환자가 살고자 하는 욕구를 모르는 보호자가 자신의 정신적·신체적·경제적인 고통만을 이유로 의사표현이 불가능한 환자의 몸에 독극물을 주사하고, 호흡기를 떼버린다면 이것은 명백한 살인행위임을 명시해야하며, 안락사 허용은 곧, 안락사 존엄사라는 거룩한 이름하에 아무런 제제 없이 살인이 행해지게 됨을 뜻하는 것이다.

여기서 존엄사라 함은 최선의 의학적 치료를 다하였음에도 회복 불가능한 사망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 질병의 호전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이루어지는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질병에 의한 자연적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면서 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무의미한 연명치료란 회복 불가능한 사망의 단계가 임박하였을 때 의학적으로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기계호흡이나 심폐소생술 등을 뜻한다.

실제로 지난 20084월 임신 2개월이었던 중국의 탕위는 머리를 감던 도중에 갑자기 의식을 잃었고 이로 인해 식물인간이 되었으며, 깨어날 가능성은 거의 희박했다. 의사는 태어가 위험하다면서 낙태를 권유했고 남편 루빙은 의사의 말을 듣고, 아이 때문에 부인이 깨어날 수 없다는 생각에 약간의 흔들림이 있었지만 남편은 아내와 아이를 포기하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기한 없는 간호를 하던 중 113, 아내는 기적적으로 출산에 성공했으며, 이후 식물인간에서 조금씩 회복되는 아내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위의 사례와 같이 사망에 이르기 전까지는 어떠한 형태든 살아 있는 것이며, 살아 있음은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생명은 어떤 것이든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의학적으로 죽기 직전의 죽음에 이르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한들 환자가 절대 살아날 수 없다고는 어느 누구도 단정할 수 없는 부분으로 과학을 넘어서 기적이란 존재로 다가올 수 있으며, 소생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이유만으로 안락사를 실시하게 된다면 이것이야 말로 살인이라 볼 수 있고 아직까지는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소생의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 어느 정동의 가능성을 뜻하는 것인지 정해지지 않았고 명확한 기준마저 없기에 한 환자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정말 옳지 못한 일이다.

때문에 많은 의사들이 환자의 뜻을 미리 알기 위해 환자가 자발적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 상태에서 작성하는 의료유언장으로 사전의료지시서를 작성하고자 하는데 이 또한 죽음을 직면한 환자와 그렇지 않은 환자는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며, 어느 누구도 자신이 어떻게 죽을 지를 예측할 수 없기에 사전의료지시서는 환자의 모든 것을 의사가 보장할 수 없다는 약점을 가지며, , 그 누구도 설려 환자 자신일지라도 생명을 가볍게 생각할 수 없다고 본다.

먼 나라 네덜란드에서는 적극적 안락사까지 법으로 인정되었는데 법이 시행된 이후부터 말기 환자’, ‘불치병 환자’, ‘소생 가능한 환자가 아닌 사람들도 의사의 도움을 받아 자살을 하려고 하며, 2009년 네덜란드 국민을 대상을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아프지 않더라도 고령자가 원한다면 자살 약을 처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네덜란드 인이 63%에 달하고 이미 안락사에 대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무감감해졌다는 심각함을 보여주고 있다.

한 예를 들면 미국의 잭 케보키언 박사는 1990년에서 1999년까지 130명에 달하는 환자가 죽도록 도왔고 이후 박사는 치명적인 약이 설치된 자살 기계를 환자와 연결하고 환자 스스로 이 기계를 작동하도록 했는데 문제는 이자살 기계를 이용한 환자들 중에서 불치병 환자가 아닌 골반 이상 환자, 노인성 치매 환자 등 목숨이 위중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는 점이다.

이를 보면 네덜란드처럼 안락사에 관한 법을 간단한 문제로 풀어 놓으면 안 된다는 점을 경고 할 수 있는 사례로 볼 수 있으며, 혹여나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한들 실제로 적극적 안락사를 지지하는 네덜란드에서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안락사를 선택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정로라고 하며, 이는 복지제도를 더 늘리지 못하고 더 많은 의료재원을 마련하지 못한 사회와 병원의 책임이라고 생각이 든다.

자신만이 자신의 생명에 대한 권리를 가질 수 있으며, 양도되거나 박탈될 수 없는 자연법상의 권리를 가족이라고 하여서 생명을 박탈할 권리가 있을까? 그 어떤 나라에서건, 친족에 대한 살인은 그렇지 않은 살인보다 무거운 형벌을 내리는데 개인의 의사반영 없이 가족만의 의사를 반영하여 안락사를 실시한다면, 이러한 살인과 다를 게 뭐가 있는가? 자신이 자신의 생명을 박탈할 권리가 있는지 조차 불분명한 지금, 가족이 의사사만으로 생명을 박탈할 이유가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본다.

 

-찬성-

 ‘안락사라는 의미는 희랍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편안함 죽음(eu thanatos)’를 뜻한다. 그러나 현대에서는 회복할 수 없는 병으로 인해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계속적으로 받고 있는 환자들과 노인 환자들을 그들이 원해서, 또는 가족 및 다른 사람들이 원해서 의사들의 개입으로 죽게 하는 것을 말한다.
 즉 극도의 고통을 종시기키기 위하여 또는 가족과 사회에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울 수도 있는 정신 질환 및 불치병에 걸린 인간에게 비참한 생명의 연장을 중단하기 위하여 행하는 안락살해
(mercy killing)를 흔히 안락사라는 말로 부르고 있다. 최근에는 의학의 진보와 더불어 의학 기술에 의존하여 목숨이 연명되는 경우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 예를 들면 극심한 고통으로 인하여 고통의 시간을 감내하는 말기암 환자들 그리고 식물인간의 경우처럼 고통은 없지만 인간으로서의 사고기능을 상실한 채 인공호흡기나 영양공급 장치와 같은 보조 수단을 통하여 삶의 시간을 연장하는 경우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 존엄성의 문제나 생명권의 문제와 관련하여 과연 이러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스스로의 생명연장을 원하지 않을 경우 이 의학 기술에 의존한 생명 연장 장치가 제거될수 있는가와 같은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

 필자는 안락사를 찬성하는 입장이다. 불치의 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환자의 죽음은 불가피한 것이며, 이환자를 위하여 고통을 진정시키는 진통제 사용 이외에 다른 어떤 치료의 방법이 없는 경우에는 그 고통과 비참함을 빨리 종식시킬수록 좋다. 사실상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계속 누워 있는 환자는 일을 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없으며 인간으로서 어떤 목적도 성취할 수 없는 실제로는 죽은 인간이라고 볼수 있다.
 또 이 불치의 병을 치료하는데 그의 가족들에게 정신적
, 경제적으로 큰 부담을 주고 막대한 의료 비용은 그 환자의 가정과 재산을 파탄시킬 수도 있다. 그러므로 환자의 생명을 빨리 단축시키는 것은 자비로운 행위라고 본다.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의사의 의무이다. 따라서 안락사는 윤리에 벗어난 것이 아니다. 환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계속되는 고통과 회복의 희망이 없는 병에 시달릴 때 자신의 생명을 끊는 것은 개인의 기본적인 자유이고 자율적인 결단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미국 플로리다 주 대법원에서는
20049, 15년째 식물인간 상태로 이는 테리 샤이보의 안락사를 허용하는 판결을 내렸다. 테리 샤이보는 1990년 심장발작으로 인한 뇌손상으로 회복 불능 판정을 받은 후 식물인간 상태로 지내오다 법원의 결정으로 20053월 영양공급 튜브를 제거한 13일뒤에 숨졌다. 영국에서도 200411, 생명유지 장치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불치병을 앓는 미숙아에 대한 안락사를 허용하는 법원의 판결이 내려졌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지 않다.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해 인위적으로 생명을 단축 시키는 행위는 형법상 촉탁살인죄나 자살방조죄가 성립한다. 그러나 소생가능성이 없는 식물상태의 환자에 대하여 인위적인 생명연장장치를 제거하는 것 과 같은 존엄사의 경우에는 실제로 병원에서 암묵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실정이고, 이를 실정법으로 처벌하는 경우도 드문 것이 현실이다.
 현대 의학에서 중환자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기술이 계속해서 발달하면서 영구의 식물상태로 죽음을 기다리는 환자의 수는 매년 증가하고 있고
, 또 많은 수의 불구아들이 태어나며, 회복할 수 없는 병으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계속적으로 받고 있는 암환자들과 노인환자들도 대단하다. 이들은 가족들과 주변사람들 모두에게 고통을 준다. 무의미한 삶을 연장하기 보다는 차라리 빨리 생명을 단축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여 여러 곳에서 안락사가 이루어 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놓고 안락사를 찬성하는 부류와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에 격렬한 윤리적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비록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지켜야 한다는 권리를 주장하는 의견이있다
. 그렇지만 귀중한 인간의 생명을 현실적인 편의와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생명을 종식시킬 수 있는 지는 깊이 숙고 해야 할 윤리적인 과제라고 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