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의 시대, 박완서의 문학
박완서의 시대, 박완서의 문학
  • 이경자 소설가
  • 승인 2011.03.29 15: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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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박완서 작가는 1931년 황해도 개풍군에서 태어났다. 위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오빠를 둔 그는 세 살 무렵 아버지를 여의었다. 남매를 서울에서 교육시키고자 했던 어머니가 먼저 오빠를 데리고 서울로 떠난 뒤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그 후 서울로 와서 매동 초등학교와 숙명여자중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 해 6월에 일어난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다.


6.25전쟁은 박완서의 꿈과 삶을 바꾸어 놓았다. 서울을 수호한다던 대통령이 도망가고 한강다리가 폭파되었을 때, 그의 생은 온통 정치권력에 대한 환멸로 물들어버렸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던 짧은 기간 뒤, 서울로 돌아온 도망자 권력자들은 남아있던 사람들을 사상적으로 의심했고, 와중에 하나뿐인 오빠가 세상을 떴다. 당장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스무 살 박완서. 우연히 미군 부대에 취직이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서툰 영어로 미군들에게 조악한 한국식 선물을 팔았는데 한쪽에 초상화부가 있었다. 화가 몇이 앉아 미군들의 초상화나 그의 가족과 연인의 얼굴을 그려주었다. 그곳에서 화가 박수근을 만났다.


장편소설 <裸木>은 전쟁의 혼란에서 절망을 살아낸 청춘을 그린 뜨거운 소설이다.
1970년, 박완서의 등단은 단연 뉴스거리가 되었다. 나이 마흔에 다섯 남매를 키우는 주부였다. 마흔이라면 하던 일도 그만두고 가정에서 안정을 찾아야했다. 하지만 박완서는 이런 차별적 편견과 고정관념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아줌마>들에게는 희망과 반역의 상징이었다. 더군다나 정부는 단군이래, 오천년의 가난을 벗자고, 범국민운동을 벌리며 주출과 성장과 소비의 시대를 선전했다.


그러나 소설가 박완서의 꿈은 선진조국의 캠페인과 달랐다. 그는 소설로 증언해야 할 것이 있었다. 그건 마치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을 억지로 입에 넣고 삼켰으되 절대로 소화시킬 수 없는 음식과도 같았다. 소화되지 않은 음식을 두고 그는 살아갈 수도, 늙을 수도 없었다.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며느리가 되고 어머니가 되는 것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했다.


결국 그의 등단작인 장편소설 나목으로부터 그는 삼킨 것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언젠가 그는 1950년을 전쟁이란 고통 없이 지났더라면 <대학교수>가 되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학교수라는 우아한 직업 대신, 소설가라는 고혈을 짜내는 일을 시작한 그는 전쟁 말고도 또 하나의 구역질나는 것을 토해야 했다. 그것은 여성차별이었다.


그가 아직 어릴 때, 동네에 바보 사내아이가 살았다. 그는 매를 맞고 다니는 게 일이었다. 누구나 당연시 여기는 현상이었다. 어느 날 바보가 박완서에게 잘못했다. 화가 난 그가 바보의 뺨을 때렸다. 그 후 바보의 어머니가 집으로 찾아와 박완서의 뺨을 때렸다. 사내아이에게 맞는 건 참을 수 있어도 여자아이에게 맞는 건 참을 수 없는 수치였던 것이다. 이 사건은 그에게 남자와 여자의 다른 위상과 그 모순의 구역질을 각인시켰다.


쉰 줄의 나이에 든 그는 두 가지 상실을 겪었다. 남편과 아들이 몇 달 사이로 그의 곁을 떠났다. 그는 아파트 생활을 접고 흙을 딛을 수 있는 집으로 이사했다. 백여 가지의 꽃이 피는 뜰에는 살구나무가 있다. 그는 살구꽃이 피고 지고 열매가 익으면 그것으로 잼을 만들어 친지들에게 나눠주곤 하였다.


지난 해 9월, 담낭암이 발견되었다. 그 후 수술과 항암치료를 하던 중, 올 해 벽두인 1월 22일 새벽 6시에 이 세상과 영원히 이별했다. 그는 당신의 성품대로 적당히 앓고 적당한 걱정과 염려를 끼친 뒤에 다른 세상으로 갔다. 그가 남긴 문학작품과 삶의 방식은 민들레 씨앗처럼 온 천지로 퍼져 그가 미워한 것들이 무엇이며 그가 사랑한 것은 무엇인지 증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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