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날아오르는 이카루스의 날개처럼
끊임없이 날아오르는 이카루스의 날개처럼
  • 서원대학교 신문방송사
  • 승인 2019.09.0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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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랑 교수의 인문학 이야기 - 비극적인 세계관, 최인훈 소설 『회색인』
[사진] 회색인 책 표지
[사진] 회색인 책 표지

최인훈 연작소설의 두 번째 작품인 『회색인』은 다른 작품에 비해 주인공이 자신의 내면세계가 타자와의 대화와 사유를 통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작품이다.

최인훈은 『회색인』을 『광장』을 쓸 무렵 가졌던 전망-‘이제부터의 문필 생활은 무언가 지적 토론의 분위기가 통상화 되는 그런 것이 될 것이라는’-이 달리 전개되는 상황에서 또다시 자기 자신이 어디에 있는가 어떤 사회에 사는가를 자기에게 설명해야 하는 새 통과의례의 전범 작성의 암중모색의 기록이라고 한다.

『회색인』의 서사 구조 – 잡지 『세대』 1963. 6-1964. 6 연재

1. 1958년 비 내리는 가을 저녁, 독고준의 하숙집에 친구 김학이 찾아와 소주를 마시며, 당시 한국의 역사와 정치에 대해 비판한다. 독고준은 어린 시절 북한의 고향 집과 가족들을 그리워하고, 학교에서 자아비판을 강요받은 기억을 회상한다.

2. 독고준은 일요일 늦잠을 자며, 전쟁이 일어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다. 전쟁 중 학교의 소집명령에 학교로 가다가 공습이 시작되어 누님 또래의 여자 손에 이끌려 방공호로 피신한다. 방공호 속에서 이성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3. 전쟁 중 가족을 두고 남한으로 내려온 독고준은 먼저 내려온 아버지를 만나지만 곧 돌아가신다.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매부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지만 거절당한다.

4. 가정교사 자리를 소개받아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던 중 가정교사 자리도 곧 끝나게 되어 생활대책을 고민한다. 그러다가 낡은 일기장 속에서 매부의 당증을 발견하고, 북한에 있는 누이를 배반하고 남한에서 결혼하여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는 매부에게 복수할 것을 결심한다.

5. 독고준은 당증을 가지고 매부(현호성)를 협박하고, 매부는 그를 자신의 집에 들어와 살게 한다. 이로 인해 독고준은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6. 독고준은 할아버지의 고향을 찾아가서 먼 친척이라도 찾아보려고 했으나 독고(獨孤) 성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는 말을 듣고 쓸쓸히 집으로 돌아온다.

7. 영화관에서 드라큘라 백작을 보고, 드라큘라 전설은 기독교신에 자리를 뺏긴 토착신의 모습이고, 현재의 우리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8. 독고준은 선교사 김순임을 좋아하지만, 순수한 그녀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자유로운 이유정에게 접근하지만 거절당한다.

9. 1959년 비 내리는 여름 저녁, 독고준의 집으로 김학이 찾아와 소주를 마시며, 혁명과 개혁에 대해 논쟁한다. 그날 밤, 꿈꾸다가 깨어나서 이유정의 방으로 들어간다.

루시앙 골드만(Lucien Goldmann)은 ‘비극적 세계관’을 타락한 현실 세계에 신은 깃들지 않으므로 그러한 세계를 부정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그러한 세계를 떠나서는 또 다른 삶의 공간이 없기 때문에 타락한 현실세계에 살면서 신이나 진정한 가치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세계인식이라고 말한다. 즉, 자아와 자아 사이의 혹은 자아와 세계 사이의 모순적 존재상황에서 발생하는 절망적인 인식이라고 규정한다.

‘비극적 세계관’은 서로 모순되는 두 요구, 자아의 진실과 세계의 허위 속에서 고뇌하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인생태도이다. 세상이 온통 거짓과 부패에 빠져 있을 때, 사람은 현실에 굽히고 들어가는 외에 세 가지 방법으로 처세할 수 있다. 하나는 거짓된 세상을 버리고 세상의 저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진실 속에 은퇴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세상을 진실된 것으로 뜯어 고치도록 현실 속에서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현실과 진실의 거리가 도저히 건너뛸 수 없는 심연에 의하여 단절되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때 있을 수 있는 제3의 태도가 비극적인 태도이다. 비극적인 인간의 절대(善)에 대한 요구가 클수록 세상이 유일한 존재의 장이면서, 타락해 있을수록 그의 전심과 부정의 변증법은 계속된다. 사실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진실이란 도대체 부재로서만 확인되는 것이다.

『회색인』에서 독고준은 가족을 북한에 두고 어린 시절 월남했으나 남한에서 만난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혼자 남게 된다. 이러한 독고준의 사유 세계는 혼자라는 외로움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하고, 현실적 어려움은 그를 절망케 하고 현실과 불화하게 한다. 어린 시절 북한에서 경험한 독고준의 성적 체험은 그의 여성관에 영향을 주고, 남한에서 만나는 여성들과 적절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 남한에서 만난 순수한 여인 김순임과 관능적이고 매력적인 여인 이유정과의 관계에서 욕망을 느끼고 갈등하지만, 그녀들과 온전한 관계로 발전하지 못한다.

어린 시절 경험한 전쟁의 잔인함과 자아비판의 상흔은 현실에서 자아와 세계의 불화로 이어지며 현실적응에 실패한다. 현실과의 불화는 독고준을 더욱 외롭게 하고, 그를 내면세계로 침잠하게 한다. 독서를 통해 자신을 치장하지만, 그는 에고에 갇혀 현실로 나오지 못한다. ‘혁명’을 외치는 김학을 비웃으며, 혁명할 시간에 ‘사랑’을 하는 것이 훨씬 보람된 시간이라고 말하는 그는 회색(灰色)인이 될 수밖에 없다.

『회색인』에서 독고준의 비극적 세계관은 타락한 현실 세계를 부정할 수밖에 없지만, 그러한 세계를 떠나서 살 수 있는 다른 삶의 공간이 없다. 그래서 타락한 현실 세계에 살면서 그가 추구하는 진정한 가치를 내면세계로 침잠시키며 살아간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 이유정의 방문을 열고 들어감으로써 그는 현실의 삶을 피하지 않고 맞서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서로 모순되는 자아의 진실과 세계의 허위 속에서 고뇌하는 독고준의 모습은 우리 모두 살아가는 인생태도이고,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피하지 않고 맞섬으로써 인간은 희랍신화의 이카루스의 날개처럼 끊임없이 날아오르는 것이다. 인간은 비극적인 현실에 살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이상과 현실은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비극적인 삶도 인간의 선택에 따라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있다. 이 또한 인간의 선택이다.

원고 | 교양대학 박해랑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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