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 것과 나인 것
아닌 것과 나인 것
  • 서원대학교 신문방송사
  • 승인 2021.06.1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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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다니던 길가에 어느새 피어난 작고 예쁜 풀꽃을 보고도 허리 숙여 찬찬히 들여다볼 새가 없다면, 흔들리는 가로수 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을 보고도 아무런 느낌이 없다면, 그리운 사람이 떠올라도 선뜻 전화를 걸어 안부를 전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잠시 멈추고 쉬는 일일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에서처럼 답답하고 막막할 때나 분노나 실망으로 마음속에 파문이 일렁일 때에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잠시 내려놓고 고요히 머무는 것일 것이다. 카밧 진은 “마음 챙김은 그냥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 미약한 숨소리일 뿐인 자신의 호흡에 집중하는 것, 주위에 있는 것 하나하나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있는 그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에게는 기능적이고 물질적인 자질과 함께 실존적이고 심미적인 자질도 있다. 기능적이고 물질적인 자질은 수치로 잴 수 있고 직접 보여줄 수 있다. 반면 실존적이고 심미적인 자질은 계량화하거나 눈앞에 꺼내 보여줄 수 없지만 삶의 충만한 순간들에서 체험되고 우리 안에 간직된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어디선가 들려오는 선율에 편안한 안도감을 느낄 때, 버터향이 물씬 풍기는 빵에 갓 내린 모닝커피를 곁들이며 휴일 아침 여유를 누릴 때, 여름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서서 주기적으로 밀려오는 바리톤처럼 부드럽고 묵직한 파도의 움직임을 등으로 느낄 때,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불빛 꺼진 휴양림 밤하늘에서 태곳적 별빛을 하나둘 알아볼 때, 붉게 물들어가는 노을을 함께 바라보다 가까운 이와 말없이 서로를 향해 환하게 미소 지을 때,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시 한 구절, 가사 한 소절에 시선이 꽂힐 때, 우리 안에 뭉클!하고 깨어나는 에너지와 같은 무엇, 그것은 실존적이고 심미적인 자질이다.

에린 핸슨은 시 <아닌 것>에서 “당신의 나이는 당신이 아니다. / 당신이 입는 옷의 크기도 몸무게와 머리 색깔도 당신이 아니다. // 당신의 이름도 두 뺨의 보조개도 당신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나인 것일까? 시인은 이렇게 들려준다. “당신은 당신이 읽은 모든 책이고 당신이 하는 모든 말이다. // 당신은 아침의 잠긴 목소리이고 당신이 미처 감추지 못한 미소이다. / 당신은 당신 웃음 속의 사랑스러움이고 당신이 흘린 모든 눈물이다. // 당신은 철저히 혼자라는 걸 알 때 당신이 목청껏 부르는 노래, 당신이 여행한 장소들, 당신이 안식처라고 부르는 곳이 당신이다. 당신은 당신이 믿는 것들이고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며 당신 방에 걸린 사진들이고 당신이 꿈꾸는 미래이다.” 나이나 옷차림, 몸무게나 머리색들을 나 아닌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기능적이고 가시적인 것들로 인해 우리가 느끼고 경험하고 또 꿈꿔오면서 쌓아온 보석같이 아름다운 자질들을 우리 스스로 너무 쉽사리 놓쳐버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당신은 많은 아름다운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당신이 잊은 것 같다. 당신 아닌 그 모든 것들로 자신을 정의하기로 결정하는 순간에는.”라며 눈이 번쩍 뜨이는 충격으로 우리의 시선을 나인 것으로 거두어들이게 한다. 삶의 속도를 조금 늦추고 주위를 둘러보며 크고 작은 생명들에서 경이를 느껴보는 것, 내 안에 일고지는 마음 물결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는 것, 그것은 게으름이나 낭비가 아니라 ‘나인 것’이 한 뼘 자라도록 기다려주는 것이다.

원고 | 교양대학 황혜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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