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을 지키려는 호국 불교의 정신, 동화사 석불
조국을 지키려는 호국 불교의 정신, 동화사 석불
  • 심은진
  • 승인 2012.10.05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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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전설여행 3 신앙 이야기

 

▲ 임진왜란 때 왜장을 벌했던 동화사 석불의 눈매가 매섭다
고려말 몽고의 침략, 일제강점기, 그리고 한국전쟁까지 우리나라는 주변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모진 시련을 겪어왔다. 이러한 굴곡의 역사 속에서도 우리나라가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는 이를 지키기 위한 선조들의 숭고한 희생덕분이다. 선조들의 희생 중에는 불교 내의 승려들도 포함돼 있다. 외세 침략에 맞서 싸운 승려들의 일화는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오고 있다. 불교 국가였던 신라와 고려를 거치면서 한국 불교가 보여준 호국성은 특수한 형태로 계승돼왔다.


  청원에도 호국불교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석불이 있다. 청원 동화사에 있는 석조비로사나불 좌상인데, 이 석불에 호국불교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온다. 전설은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때 청주를 공략한 왜장 구로다의 휘하에 있던 한 왜장이 청주로 들어오다가 서쪽 동화산에 황금 후광이 비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산속에 보물이 있을 것으로 생각해 동화산으로 들어왔다. 왜장은 동화산 아래 동화사 법당문을 열어 젖혔고, 후광은 그 석불에서 나오고 있었다. 법당문을 열자 후광이 사라지면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던 석불의 얼굴이 서서히 좌측으로 돌아가면서 외면을 하였다.


  이것을 본 왜장은 불안함에 화를 내며 장검을 들어 석불의 목을 쳤다. 한 칼에 베어진 석불 머리는 목을 벤 왜장의 발등 위로 떨어져 발목을 분질러놓았다. 놀란 왜병들이 황급히 왜장과 밖으로 나왔는데,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끼면서 뇌성벽력과 함께 소나기가 퍼부었다.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 왜병은 근처 고목나무 밑으로 들어갔다. 이때 벼락이 고목 위로 떨어져 반수 이상의 왜병들이 현장에서 불타 죽었다. 석불의 목을 쳐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던 왜병들은 국사봉에 은신하고 있던 의병장 조헌의 민병에 의해 몰살됐다.


  그 후 마을 유지가 석불 머리를 수습하여 보수를 하였는데, 이 때 실수로 붙여진 이유때문인지 청원 동화사 석조비로사나불 좌상은 정면이 아닌 약간 기울어져 앞을 바라보고 있다.

 
  청원 동화사로 가는 길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육거리 시장에서 문의방향으로 가는 313번 버스를 타면 된다.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가다보면 동화사가 있는 산길로 오른다. 등동 2구역에서 내려 5분 정도 길을 따라 내려가면 동화사가 있다. 크지 않은 아담한 절이 차가 다니는 길옆에 있어서 더 조용하고 쓸쓸해보였다.
  법당 안으로 들어가 석조비로사나불 좌상을 바라보았다. 옆으로 눈을 지그시 뜬 채로 바라보는 불상의 모습에서 의연함을 느낄 수 있었다.


  속세와 구분되는 탈속의 공간, 불교. 하지만 속세 공간에서 일어난 나라를 위협하는 공격에 속세와는 다른 방식으로 왜병을 물리친 동화사의 석불의 모습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

  국어국문학과 이주영 교수는 “살생을 금하는 불교에서 승려들이 전쟁에 참여한단 것은 쉽게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며 “나라를 지키는 것과 종교적 신념 사이에 적잖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고 전했다. 이어 “동화사 석불 전설에서 석불이 후광으로 왜장을 유인하고 외면했다는 내용은 종교의 본의를 잃지 않으면서 속세에 대한 최소한의 간섭을 시도한 것이다”고 해석했다.

  피로써 이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에게 잘못된 길을 따끔하게 가르쳐준 석불의 가르침, 이것은 불교의 참된 정신일 것이다. 아직까지 측면을 바라보고 있는 청원 동화사 석불은 잊을만하면 망언과 역사왜곡을 일삼는 중국과 일본을 무섭게 응시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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