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발로 만들어낸 45년의 역사, 서원대신문
두 발로 만들어낸 45년의 역사, 서원대신문
  • 심은진
  • 승인 2013.05.29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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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이 걸어온 길을, 시대의 흐름을 써내려와
  1. 1986년 9월에 15일에 발행된 청사대신문. 지금과는 다르게 청사대신문이라는 명칭으로 발행되고 있었다.
  이 당시 신문 1면을 장식한 기사를 보면 '학원향방 아직 불투명'이라는 제목으로, 당시 설립자측과 학생대표자간의 학원향방에 대해 열띠게 논했던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시 본사는 '학원발전여론조사 특별 소위원회'가 결성돼 학우 66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었다. 학원향방에 대한 의견, 설립자측를 바라보는 시선 등 학생들의 학원향방에 대한 관심도가 높았던 결과를 볼 수 있다.
  또한 총학생회 말고도 학우들 사이에서 새로운 기구편성, '민주학우'라는 대자보 게재 등 당시 사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려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 1986년 9월 15일 신문

 

 

 

 

 

 

 

 

 

 

 

 

 

 

 



  2. 1986년 8월 31일자 청사대신문에는 당시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독립기념관 화재’를 역사적 상황과 사건이 발생한 이유에 대해 폭넓은 관점으로 다루고 있다. 8월 15일 광복절에 맞춰 개관식을 가지려고 했지만 이를 10일 남짓 남겨두고 8월 4일날 기념관 본관에 불이 난 것이다. 당시 경찰에서 내놓은 화재원인은 110V 용량의 백열등 회로를 380V 전원에 연결시켜 과열 과전류에 의한 고열현상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당시 상식이하의 답변이었기 때문에 설득력이 없었다는 것과 네 번이나 원인을 번복했던 것이 맞물려 의혹을 증폭시켰다.
  기본적으로 사건을 초래했던 이유는 ‘날림 공사’였다.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는 국가적 사업이었는데도 불구하고 1년을 앞당겨 바쁘게 공사를 진행한 것이 발단이었다. 이는 광복절의 의미와 독립기념관 건립 자체의 참된 의미를 무색하게 만든 일이었다.

▲ 1986년 8월 31일 신문

 

 

 

 

 

 

 

 

 

 

 

 

 

 

 

 

 

 

 

 

 

 


  3. 1988년 3월 16일 서원대 신문에는 청주사범대학에서 일반대로 전환해 새롭게 '서원대학교'라는 이름으로 제2의 시작을 준비하는 대학 모습이 담겨 있다. 사범대학 학칙 변경 이후, 사범대학의 존립성 여부가 조금씩 제기되면서 여러 갈등이 있었지만 결국 개교 20주년 만에 일반대학으로의 전환이 최종 결정된다.
  일반대학의 전환을 다룬 다음의 기사는 특집기획으로 20년간의 서원대 역사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고, 88년도 서원대 당시 모습에 대해 평가하고 있다. 강의동 신축 공사를 비롯해 노천강당, 각개전투교장, 기숙사 등 후생복지시설을 확충하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일반대 전환으로 부족한 교원확보, 캠퍼스 정비 등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꼬집고 있다.
  대학의 발전을 위한 다양한 목소리를 듣는 '내 생각에는' 코너 등 학우들에게 열린 소통망이 되고 있던 서원대신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 1988년 3월 16일 신문

 

 

 

 

 

 

 

 

 

 

 

 

 

 

 

 

 

 

 

 

 



  4. 1990년 3월 16일자 서원대 신문은 특집 기획으로 사회문제에 대한 심층 취재면이다. 취재면의 '학생운동의 순수성과 충총련'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학생운동과 반민주야합을 원하는 기득권 세력간의 팽팽한 싸움을 볼 수 있다.
  87년 6월항쟁 이후 급성장한 전국적 대중조직과 민주교육쟁취, 국가보안법 철폐, 통일 등 미국과의 관계에 위기감을 주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극우적 이념을 보이는 보수세력의 활발한 활동은 학생운동의 침체를 더 부각시키게 됐다. 이로 인해 선진활동가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충북지역 총학생회연합 준비위원회(충총련)'이 발족을 선언하게 됐다.
  당시 정부는 학생운동의 성장을 정권유지의 걸림돌이라 생각해 학생회를 주축으로 일반 학생들과의 관계를 분열시키기 위한 적대적 분위기를 조장했다. 이때 등장한 충총련을 바라보는 학생들의 시각은 저마다 달랐을 것이다. 운동권과 비운동권으로 나눠 대학생을 분류하던 당시 정권의 모습과 주체적인 학생들의 민주적 운동이 곳곳에서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 1990년 3월 16일 신문

  5. 1997년 3월 4일자로 발행된 신문은 우리대학이 법원의 압류결정으로 신입생 등록금 약 22억원이 출금정지가 돼 학내 구성원 모두가 충격에 휩싸인 사건을 다루고 있다. 중앙종합금융이 우리 대학을 상대로 낸 채권압류소송 판결에서 예치하던 충북은행 내 예금을 압류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 때문에 충북여고, 운호중, 부설유치원 등 산하 학교들까지 피해를 입게 됐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 1992년 강인호 전이사장이 서울의 중앙종합금융에서 학원명의로 대출을 받은 뒤 갚지 않아 소송을 걸게 된 것이었다. 이미 당국은 95년에도 소송에서 졌던 경험이 있어 당시 사건은 대학과 법인 회계의 분리원칙, 채권단 배후설 등 여론이 들끓었다.
  당시 신입생 등록금 출금 정지 조치와 관련해 폐쇄된 충북은행의 사진 속 모습은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 1997년 3월 4일 신문

  6. 다음 기사는 1998년 6월 2일에 사회면에 실린 '경제위기 극복 위한 대책마련'이라는 기고문이다. 민주노총 충북지역본부 정보통신국장 김용직 씨가 쓴 기고문은 IMF 이후 경제위기를 맞은 우리나라의 진정한 경제위기를 가져온 정경유착을 비판하고, 관철시키고자 했다.
  당시 민주노총이 ‘재벌개혁’을 외치면 정치권과 자본은 좌익세력으로 몰아가거나 민주노총 총파업을 주가의 폭락, 대외신용도의 추락으로 포장하는 등 정권과 민주노총의 갈등은 고조됐다.
  세계적인 신용평가 기관인 S&P(스탠다드 앤 푸어스)의 국가신용평가국장은 당시 민주노총을 방문해 “한국의 국가신용등급 조정에서 주요한 심의기준은 재벌의 구조조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이 주요 관건이다”고 밝혔다.
  민주노총은 20-30%의 국민을 죽이지 않고 모두를 다 살릴 대안인 ‘노동시간 단축’을 주장했다. 지금까지도 우리나라 노동현실을 보면 OECD 가입 국가 내 최장 노동시간, 비정규직 문제, 낮은 최저 임금 등 열악한 것이 사실이다.
▲ 1998년 6월 2일 신문

  7. 2001년을 이끌어갈 총학생회, 총여학생회, 학생복지위원회, 각 단대 학생회, 동아리연합회 등 선거 관련 기사가 2000년 11월 29일자 신문 1면을 장식했다.
  당시 선거는 11월 24일로 예정돼있었지만,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열리지 않아 선거 일정이 늦춰졌고, 후보자 등록여건이 되지 않아 선거가 이주 뒤로 연기됐었다. 선관위는 입후보자의 자격심사, 선거 운동 방법, 선거일정 선정, 선거시행세칙 작성 및 공고 등 선거에 관한 전반적인 업무를 담당한다. 그러나 선관위가 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않아 정족 수 미만으로 세 차례나 회의가 열리지 않았다.
  이것 말고도 가장 큰 쟁점으로 떠오른 것이 ‘각 후보 추천인 서명날인’이였다. 입후보를 하기 위해서는 ‘선거권자 1/15 이상의 추천서’가 필요하다. 하지만 추천서를 받는 과정에서 거짓으로 도장을 회수하거나 도장을 임의로 파서 하는 등 누더기인 선거를 야기했다.
  또한 투표율이 50%를 넘지 못해 다음날까지 연장되거나 재투표를 실시하는 등 무관심한 선거문화를 보여줬다. 이번 선거는 중앙선관위, 학생회의 후보 추천인 서명날인제도, 학우들의 저조한 선거 참여 등이 하나가 된 총체적 부실선거였다. 이번 사건을 반면교사로 삼아 성숙한 대학 선거 문화 정착에 힘써야 할 것이다.
▲ 2000년 11월 29일 신문

  8. 2000년 3월 7일 서원대신문 제 377호 주제기획으로 청주 AMK 여성 노동자의 투쟁을 보여주고 있다. 기사는 당시 여성 노동자들의 임금착취의 현장을 소개하며 청주 AMK를 소개하고 있다. 미국 다국적 기업 AMC가 100% 투자한 외국인 투자기업인 AMK는 저임금, 노동착취를 회사 운영의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해 1월 7일 본사의 부도로 폐업을 맞이했다.
  이 사실을 통보받지 못한 채 출근한 노동자들은 폐업글귀가 적힌 대자보로 해고사실을 처음 접하게 됐고 이는 결국 철야농성으로 이어지게 됐다. 당시 노동자들의 한 달 월급은 41만 8천 5백원으로 그 시절 우리나라의 최저임금인 39만 6천 8백원을 간신히 넘는 수치였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휴가까지 반납하며 회사를 위해 일했지만, 회사는 무급휴직의 강요와 월급, 상여금 등의 사항을 지급하지 않는 등의 횡포를 보였다.
  AMK 여성 노동자들의 소망은 외국 자본의 유치를 막는 것이 아닌 노동의 대가를 정당히 받고 권리를 보장받는 일자리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평범한 노동자의 권리 주장이 묵살되는 암담한 노동실태를 보여준 기사였다.
▲ 2000년 3월 7일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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